당연하지 않은 것이 당연해진 인간세상
흔한 일입니다. 같이 이야기하고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웃기 시작하면, 왜 웃는지 모르면서 같이 웃는 일 같은 것 말입니다.
다 웃은 다음에 왜 웃은 거냐고 물어보겠지만 일단 지금은 따라 웃고 보는 겁니다.
그렇게 따라 웃는 사람을 보고 ‘너 참 이상하다. 웃는 이유도 모르면서 웃기는 왜 웃니?’라고 따지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다들 그 사람이 웃은 이유를 알고있기 때문입니다. 말 그대로 그냥 따라 웃은거죠.
우리는 사전에 약속한 바 없습니다. 모두 웃는 분위기에서는 이유를 모르더라도 함께 웃자고 누구도 정하지 않았음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합니다. 살면서 자연스럽게 습득한 것입니다. 왜 그런지는 몰라도 다들 그렇게하니까요.
그외에도 우리는 살면서 많은 것을 자연스럽게 습득합니다. 사소한 것 몇 가지만 말해보자면, 우리의 어린시절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무단횡단하면 안 된다고 말하던 부모님이 아이의 손을 잡고 무단횡단을 했을 때, 지금은 도로에 차가 없으니 괜찮다고 말하는 그들을 보면서 아이는 자기합리화를 배울 겁니다.
거짓말하면 안 된다고 가르치고는 거짓말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아이는 진실이나 약속 따위가 얼마나 부질없는지 알게 될 테고 세상이 얼마나 공허하며 거짓으로 가득 차있는 곳인지 알게 되겠지요.
영리한 아이는 진실과 거짓을 이용하는 방법을 습득할 것입니다.
보통의 사람은 그렇게 습득한 자기합리화와 자기변명과 부조리와 비합리와 비열함과 비겁함을 납득하고 순응한 채로 살아갑니다. 적당한 이기심과 적당한 도덕성, 그리고 적당한 양심을 가진, 사회가 요구하는 인간으로 완성된 것입니다.
이제는 다른 사람들처럼 사회적 규범이나 도덕성 같은 것들은 적당히 지키고 때로는 적당히 이용하면서 나의 말과 행동과 생애를 대하는 태도 따위의 옳고 그름은 따지지 말고 사회 구성원으로서 살아가면 됩니다.
왜냐면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사니까요.
사회나 집단이 소위 ‘인간’이라고 부르는 인간들의 세상은 그렇게 당연하지 않은 것들이 당연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이런 세상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마치, 왜 웃는지도 모르고 따라서 웃는 사람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그저 납득해버리는 것처럼.
하지만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당연하지 않은 것이 당연하 게 되어버린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이유도 모르고 분위기에 휩쓸려 웃는 일을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
그럼에도 그런 사람들 틈에서 그런 사람인척 살아야하는 사람.
그가 바로 인간실격의 주인공 요조라는 인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작가가 인간실격이라는 작품과 요조라는 인물을 통해 말하고자 한 것은 이러할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은 것이 당연한 것이 된 부조리한 세상에서 당신은 부조리한 사회가 요구하는 소위 ‘인간’이라 불리는 인간이 될 것인가, 당연하지 않은 것을 당연하지 않은 것으로 두고 힘없는 개인으로 남을 것인가. 혹은 그 둘 사이에서 길을 잃고 헤매이다 ‘인간’도 ‘나’도 되지 못한 채로 인간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할 것인가.
인간실격의 구성
인간실격은 서문과 요조라는 인물의 수기 세 편, 그리고 후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서문과 후기의 화자는 ‘나’라는 인물인데 그는 서문에서 요조가 피사체인 사진 세 장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첫 번째 사진, 어린시절의 요조
정말 그 아이의 웃는 얼굴은 곰곰이 뜯어보면 볼수록 뭐라 할 수 없이 꺼림칙하고 섬뜩한 느낌을 준다. 애초에 이건 웃는 얼굴이 아니다. 이 아이는 전혀 웃고 있지 않다. 아이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있는 게 그 증거다. 사람은 이렇게 주먹을 불끈 쥐며 웃을 수는 없는 법이다. 원숭이다. 원숭이가 웃는 얼굴이다.
더클레식, 인간실격, p8
두 번째 사진, 십대의 요조
가슴팍의 호주머니에 하얀 손수건을 꽂은 교복 차림으로 등나무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서는 이번에도 역시 웃고 있다. 이번 사진에서는 쪼그랑 원숭이의 웃음이 아닌 제법 기술적인 웃음을짓고 있기는 한데, 어딘가 인간의 웃음과는 다르다. 피의 무게라고 하나, 생명의 깊은 맛이라고 하나, 그런 충실감은 티끌만치도 없이 그야말로 새처럼, 아니 깃털처럼 가볍게, 그저 백지 한 장처럼 그렇게 웃고 있다.
더클레식, 인간실격, p9
세 번째 사진, 중년의 요조
이번에는 웃고 있지 않다. 아무 표정이 없다. 말하자면 앉아서 화롯불에 두 손을 쬐는 자세로 자연스럽게 죽은 것 같은, 정말이지 소름끼치고 불길한 기운을 뿜어내는 사진이었다. 기괴한 건 그뿐만이 아니다. 이 사진에는 얼굴이 꽤 크게 찍혀 있어서 생김새를 찬찬히 살펴볼 수 있었는데, 이마도 평범하고 이마의 주름도 평범하고 눈썹도 평범하고 눈도 평범하고 코도 입도 턱도 평범한 게, 하아, 이 얼굴에는 표정만 없는 게 아니라 인상이라는 것 자체가 없구나.
더클레식, 인간실격, p10
이 세 장의 사진만으로 요조라는 인물의 일생의 과정이 어떻게 나아갈지 조금은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그가 종국에는 인간으로서의 존재감을 상실하고 인간의 자격을 잃은 채로 사라져버릴 것을 말입니다.
참 부끄러운 생애를 보내왔습니다.
더클레신 인간실격, p11
첫 번째 수기의 첫 문장입니다. 그는 처절한 자기반성으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두번째 문장.
저는 인간의 삶이라는 걸 도무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더클레식 인간실격, p11
바로 이어지는 첫 문장과 두번째 문장, 이 두 문장이 <인간실격>의 주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일생에 대한 자아성찰과 인간성에 대한 의문.
요조는 첫번째 수기에서 도무지 인간의 삶을 모르겠다고 여러 차례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위선과 가식으로 서로를 기만하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는 인간에 대한 두려움과 지독한 불신으로 인간 세상에 적응하지 못합니다. 인간 삶의 바깥에서 이방인처럼 맴도는 삶을 살면서도 그런 자신을 들키고 싶지 않아 합니다.
그렇기에 그는 천진난만하고 낙천적인 척하며 익살스러운 광대의 가면을 쓰고 그렇게 두려워하는 다른 인간들처럼 주변 사람들을 기만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인간스러움에 대해 묻다.
이 작품을 쓴 다자이 오사무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네 번의 실패 끝에 다섯 번 만의 성공이었습니다.
그의 본명은 츠지마 슈지로 고리대금업으로 부를 축적한 집안에서 태어난 것에 혐오감과 죄악감을 가진 채 살았습니다.
태어나서 자신이 먹고 마신 음식과 입었던 의복과 몸을 뉘였던 집이 모두 다른 이들의 피와 눈물을 양분으로 맺은 열매라는 것.
사는 데 필수적으로 필요한 모든 것이 그에게는 죄악이었을 것입니다.
먹는 것, 마시는 것, 잠을 자는 것, 인간으로서 당연해야할 욕구가 그에게는 얼마나 고통스러운 죄악감이었을까요.
인간으로 살기 위해 인간으로서 느끼는 죄악감을 외면해야 할까, 양극단에서 매일 밤 고뇌했을 그의 선택은 결국 인간에서 해방되는 것이었습니다.
이 인간실격은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는 이 이야기로 하여금 사람들에게 묻고 싶었을 겁니다.
인간 답다는 건 대체 무엇인가? 하고 말이죠.
그런 것은 고민은커녕 한번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을 조금 가엽고 한심하게 여기면서, 생각이라도 한 번 해보는 게 어때? 한 걸지도 모르겠네요.
다자이 오사무가 자살했다는 걸 알고, 인간실격 내용 중에 이 문장이 생각 났습니다. 인상 깊게 읽어서 기억에 남은 문장입니다.
그저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제가 지금까지 아비규환으로 살아온 소위 인간세상에서 딱 하나 진리 같다고 느낀 것은 그것 뿐이었습니다.
더클레식 인간실격, p155
인간실격을 재미있게 봤다면, 이 영화도 감상해 보세요.
영화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2006)> 그리고 <인간실격(2019)>
이 두 작품은 소설 인간실격을 영화한 작품은 아닙니다.
영화 <인간실격>은 소설 인간실격의 작가 다자이 오사무의 삶과 사랑을 그린 영화인데, 생각보다 어두운 분위기의 영화는 아니더군요.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도 마찬가지로 다자이 오사무의 인생에 영감을 받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근데 이건 저도 아직 감상전이라 어떨지 모르겠네요.
혐오스러운 미츠코의 일생은 뮤지컬로도 나왔었죠. 아이비님이 미츠코 역을 연기했습니다.
나 비리애님 따라쟁이잖아. 인간실격 보려고 대여했습니다. 조만간 볼 것!